< >

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8월의 크리스마스 관련 사진

    1. 시한부 정원과 다림

    한석규가 연기하는 주인공 정원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병원에 갔다가 텅 비어있는 운동장에 앉아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독백합니다. 직접적으로 무슨 병이고 살 날이 얼마나 남았고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정원 :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관객들은 이 사람이 앞으로 얼마 못 살겠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죠.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흔하게 보듯이 슬퍼하거나 비통해하거나 절망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마치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들른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을 찍어주고 찍은 사진을 현상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죠. 주인공의 행동만 다른 게 아니라 영화의 태도 역시 다릅니다. 카메라는 섣불리 당겨 찍거나 멀리 찍거나 뭐 등등 이런 잔재주를 부리지 않으며 멀찍이 서서 아버지와 함께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주인공의 일상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문득문득 들어오는 슬픔의 감정까지 따뜻한 색깔로 관망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굳이 감정을 강요하지 않죠. 덕분에 편안한 감정으로 한석규가 연기하는 정원이라는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이영화가 그리고 있는 남녀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엄청나게 운명적이고 우연한 만남으로 만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때의 심은하 씨는 "아름답다"는 말로 어떻게 다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주차 단속 요원인 다림은 동네 사진사인 정원과 언제가 한 번쯤은 만났을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정원과 다림은 연애를 한다고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사이로 그려집니다. 낯선 남녀가 서로를 알아보고 반복적으로 만나고 호감을 갖고 대화를 하다가 데이트를 한번 하는 정도죠. 이들의 만남은 정원의 일상이라는 틀을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한석규 스타일의 사람 좋은 웃음을 계속 달고 지내는 정원 때문에 이 영화는 중반쯤까지 시한부 인생의 주인공을 다루고 있음을 종종 잊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슬픔이 없을 수는 없겠죠. 정원은 발톱을 깎다가 문득, 친구와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진탕 술을 마시다가 벌컥, 첫사랑이었던 여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깐, 죽음이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없이 혼자 남겨지게 될 아버지 옆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비디오 사용법을 알려주다가 
    아버지가 잘 알아듣지 못하시니까 답답해져서 화를 벌컥 낸 다음에 비디오 사용법을 글로 남겨 놓기도 합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이 신나게 놀다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죠. 드러내서 슬퍼하는 대신 그는 그다음을 준비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으면서 웃으시는 할머니처럼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한 거죠. 그런데 자꾸만 다가오는 다림을 향해서 움직이는 마음만은 어떻게 정리를 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마음을 받아주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냉정하게 내치지도 못합니다. 조금은 나한테 시간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정원이 다시 병원에 다녀온 날 그의 뒤를 따르는 여동생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위해 기계 사용법을 정리해 놓고 혼자 조용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그의 모습에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우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죠. 결국 그는 다림에게 어떤 기별도 남기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남겨진 다림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편지도 써보았지만 그는 소식이 없습니다.

    2. 울컥거렸던 명장면

    1. 비디오 사용법
    실제 허진호 감독의 경험담인데요. 정년퇴임을 하신 아버지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갑자기 사 오신 비디오 데크를 잘 사용할 줄 몰라서 허진호 감독이 사용법을 가르쳐 드렸는데 잘 못 따라 하셨다고 합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극 중 주인공이 '시한부 아들의 입장에서 그 심정을 그려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굉장히 롱테이크였습니다. 무려 1분!! (긴 시간을 짧은 컷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를 보여주는 롱테이크 기법)
    자칫 연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빛, 미술적 감각, 공간감, 깊이감을 이용해 영화적인 순간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2. 밝은 표정의 영정사진
    어떤 잡지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고인의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았었는데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웃고 찍으면 어떨까' 故김광석 씨의 영정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은 허진호 감독이 넣은 장면이라고 합니다. '사진사'와 '영정사진'이 만나서 탄생한 감동적인 멜로 영화인 것 같습니다. 
    3. 다림의 편지를 읽은 모습
    극 중 주인공이 다림의 편지를 읽으면서 표정이 변하는 정원의 진지함이 보이는데요. '이 단어의 숨은 의미는 뭘까?', '이 문장은 어떤 감정으로 쓴 걸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연애가 천천히 진행되기에 감정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슬쩍 팔짱을 끼던 다림과 놀람을 감추려는 정원의 순수한 모습이 내가 연애하는 느낌이 들고 되게 좋았었습니다

    3. 불치병의 여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사랑받은 작품이지만 일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그 이유가 일본의 거장 감독들이 추구하던 절제의 미학이 돋보인 톤&매너,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허진호 감독 특유의 연출법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국 영화에서 연애만 했다 하면 영화가 끝나기 전에 주인공들이 거의 무조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죽는 이유도 굉장히 다양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불치병으로 사망했죠. 따지고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당시 유행하던 불치병 로맨스 영화들의 공식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남녀 주인공의 연애가 제대로 한번 이뤄지지도 못하고 그 흔하디 흔한 입맞춤이나 포옹 한번 없이 끝남에도 불구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가 한국 멜로 영화의 수작으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일들인 사랑과 죽음을 모두 일상 안으로 넣은 다음 조용히 담아낸 시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슬퍼지는 존재가 아닌 잘 찍은 사진처럼 상대방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존재로 남는 게 그러기 위해서는 다가서는 대신에 물러나는 게 오히려 더 나을 때가 있는 법이죠.

    - 정원 :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강렬하진 않지만 기억 속에 아주 오래 남을 영화였습니다.

    반응형